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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갈등과 실체 없는 분노의 서사 - "버닝" (2018)

ninetwob 2025. 2. 5. 22:16

이창동 감독의 2018년 영화 <버닝>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삼아, 현대 사회의 소외와 분노를 강렬한 미장센과 철학적 서사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가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쳤으며, 이창동 감독 특유의 사실주의적 연출과 상징적인 서사가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버닝>이 다루는 계급 문제, 욕망의 실체, 그리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분노와 소외감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호한 현실 속 불안한 청춘

영화의 주인공 종수(유아인 분)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홀로 남겨진 채, 일용직 노동을 하며 작가의 꿈을 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우연히 어린 시절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지만, 그녀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 벤(스티븐 연 분)이라는 의문의 남성과 함께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긴장감을 더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한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계급 문제를 상징적으로 담아냅니다. 종수는 희망 없는 청춘을 대변하는 캐릭터로,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반면 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며,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 대조적인 두 인물의 관계는 현대 사회에서 계층 간 격차가 만들어내는 불안과 소외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불타는 헛간과 은유적인 상징들

벤은 종수에게 자신이 "때때로 헛간을 태운다"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로, 실제로 헛간을 태우는 행위인지, 혹은 비유적인 표현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는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미스터리적 요소이자,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헛간을 태운다는 행위는 현대 사회에서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갖는 무책임한 태도와 욕망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벤은 타인의 삶과 감정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그 과정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의 행동은 종수에게 더욱 큰 불안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결국 종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실체 없는 분노와 상실감

종수는 해미가 갑자기 사라진 이후 점점 더 불안과 혼란에 빠집니다. 그는 해미를 찾기 위해 벤을 뒤쫓지만, 그녀가 존재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수는 점점 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워하며, 그의 분노는 구체적인 대상 없이 증폭됩니다.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막연한 분노와 불안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종수의 감정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증오가 아니라, 자신의 무기력함과 소외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해미의 실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종수가 느끼는 상실과 불안의 극대화된 형태로 작용합니다.

결말의 의미 - 해답 없는 질문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종수는 벤을 살해하고 그의 차를 불태웁니다. 이 장면은 종수가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순간이지만, 그 행위가 실제로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불확실합니다. 벤이 해미를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고, 종수의 행동이 정의로운 복수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열린 결말을 통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종수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을까? 해미는 정말 존재했던 인물인가? 벤은 단순한 부유층 인물일 뿐인가, 아니면 진정한 악을 대변하는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관객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듭니다.

버닝이 남긴 철학적 메시지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통해 단순한 미스터리 이상의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영화에서 종수는 결국 자신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 채 감정에 휩쓸려 벤을 살해하지만, 이 행위가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느끼는 무력감을 상징하는 동시에, 우리가 분노하는 대상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집니다.

 

<버닝>은 이러한 감정을 강렬한 이미지와 서사로 형상화하며,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과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깊이 탐구합니다. 벤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계층 간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하나의 현상이며, 종수의 분노 또한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버닝>은 단순한 미스터리 스릴러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느끼는 불안과 소외, 그리고 막연한 분노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는, 현실의 모호함과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종수의 불타는 분노는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적인 문제의 반영입니다. 영화 <버닝>은 그러한 감정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논의될 만한 가치를 지닙니다.